크리스쳔/결혼 EP.004 ***의 무게 : 히브리서 11장 6절

하나님이 나의 결혼에 대해 말씀하신 이후에도,
내 삶에 아무런 변화는 없었다.
그날, 하나님은 결혼을 통해서, 나의 배우자를 통해서 나에게 은혜를 부어주길 원하신다는 말은 참 놀라웠다. 나의 관념 속에서 “결혼은 나를 소모시키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뿌리 깊었다. 나는 20살 때부터 은연중에 알았던 것 같다. 결혼이 핑크빛 동화가 아니라는 것을. 보통 19살, 스무 살은 대학에 들어가 멋진 남자친구와의 연애를 꿈꿀 시기가 이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했다. 나는 이때 거리 위에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부부들들의 표정을 유심히 봤다. 그들의 표정은 모두 고통스러운 얼굴이었다. “결혼은 얼굴 표정을 어둡게 만드는구나..”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힘들고 나 자신을 낡게 만드는 결혼 대신, 사랑을 선택하겠다며 내 가치관을 정립했던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 생각과는 달랐다. “나는 배우자를 통해 너에게 은혜를 부어주기 원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해주셨다고 해서 다음날 당장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갑자기 다음날 어떤 남자를 만나게 되지도 않았다. 심지어 하나님은 이후 연애나 결혼에 대한 어떠한 말씀도 없으셨다. 예를 들면 이제부터 배우자에 대해서 기도해라 라던가.. 가정은 이런 것이다. 소개팅을 해라.. 등등 이제 결혼을 준비하기 위한 다음 수순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음성을 들은 후 4년이 넘게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연애나 남녀간의 사랑에 대한 어떤 음성이나, 말씀, 현실속의 어떤 사건도 전혀 없었다.
나도 이 말씀을 듣고도 실제로 결혼에 대한 기대감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나는 연애를 하고 있지 않았고, 연애할 생각이 딱히 없었다. 해외에 오고 나서 몇몇 남자친구들이 있었지만 모두 헤어졌고, 코로나가 왔다. 이후 나는 이전에 있던 나라를 떠나 독일로 이주해 왔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나의 인간관계는 직장동료들을 제외하고 거의 제로가 되었다. 나는 원래 직장동료와 절대 가까지 지내지 않는다. 내 나이가 이미 30대 후반이고 전공 특성상, 우리 회사에 남자동료들이 대부분인데 모두 아이가 있는 유부남들었다. 아무튼 내 주변에 나와 연관된 미혼의 남자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나도 이 나이쯤 되니 연애라는 게 상당히 귀찮았다. 그리고 나는 남자를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는다. 다 알지 않는가? 사람은 기본적으로 귀찮은 존재다. 남자라고 뭔가 특별하지 않다. 그 동안 남자친구들 모두 좋은 사람이었지만… 뭐 남자도 사람이고, 그 밑바닥을 보면 사람은 의지할 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다. 연애보다는 내 인생에 이뤄야 할 과업들 영주권 문제 나의 직업과 미래에 대해서.. 아직도 불확실하게 바다 위에 흘러가는 것 같은 내 인생을 구원하는 게 나에겐 더 시급한 문제였다.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신 하나님
하지만 이 날 이후로 하나님은 나에게 이전 보다 더 가까이 다가오셨다. 내가 사는 곳에는 큰 호수가 있다. 걸어서 한 바퀴를 돌려면 2-3시간 정도 걸릴 정도로 엄청나게 큰 호수다. 나는 주말에 이 호수 주변을 혼자 걸으며 산책하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혼자 호수를 걸으며 산책할 때,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에 “Chloe, 너를 사랑한다”라고 불쑥불쑥 말씀해 주셨다. 나 자신에게도 나는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건 내 마음속에서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 나는 감정적이기보다는 지적인 활동을 주로 하는 사람이다. 감정적인 자극보다는 현상을 분석하고, 깊이 사색하고 결론을 도출해 내는 것을 좋아한다. 사랑이라는 내 주관적인 감정보다는 세계정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고…. 아무튼 감정적인 건 별로 익숙하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런 나의 마음에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시고 불쑥불쑥 “Chloe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는 말씀을 자주 해주셨다. 아무튼 하나님은 나에게 한 발자국 성큼 다가오셨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혼자 산책을 하려니 좀 심심한 것 같아서 성경 말씀이라도 하나씩 암송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산책하기 전에 인터넷에서 말씀을 하나씩 뽑아 산책하면서 암송했다.
“반드시”라는 말의 무게감
이때, 나의 마음에 말을 거는 성경 말씀이 두 개가 있었다. 시편 23편 6편 말씀과, 히브리서 11장 6절 말씀이었다. 산책하면서 외우다 보면 말씀에 대해서 씹고 씹어 생각하게 되는데, 이 두 성경말씀에는 ‘반드시’라는 단어가 있었다, 말씀을 계속 외우기 위해 여러 번 의미를 생각하고 반복하면서 말하다 보니 이 단어가 굉장히 거슬렸다. 반드시라는 말은 ”단 한 번도 틀리지 않고 “라는 말이다. 세상 경험을 하며 공부를 하면 할수록 세상의 모든 일에는 예외가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다. 그래서 “반드시 이렇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전문가 일수록 잘 사용하지 않고, 사실 기피해야할 단어다. 굉장히 위험하고 논리적으로 오류를 불러일으킨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에 왜냐면 세상에 반드시 이렇게 되는건 몇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또한 어떤 것을 “반드시 이렇다.” 단정지어 말하기가 조심스러워진다. 사실 내가 처음으로 영문 글쓰기를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바로 단정적인 표현은 왠만하며 피하라 였다. 그래서 반드시라는 단어가 상당히 내 눈에 띄였다.
1. 첫 번째 반드시: 시편 23편 6절

시편에 다윗은 <내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른다>고 말하고 있다. 이 반드시라는 말이 주는 무게감이 참으로 어마어마했다. 과학자의 시선으로 느껴지는 이 반드시라는 단어.. 음, 단 한 번도 빼놓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 평생에 따를 것이라고 고백하는 다윗의 믿음은 도대체 어떠했던 걸까? 단 0.000001%의 의심도 없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그와 함께 할 거라고 믿을 뿐 아니라 이렇게 영원히 남는 책에 글로 적어 놓다니….그건 다윗이 특별해서 그랬을까? 나도 이 지구를 사는 인간인데 하나님은 나에게는 선하심을 조금 베푸시는 걸까?
말씀을 암송하면서 하나님은 나에게도 반드시, 어떠한 오차도 없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베푸시며 내 인생도 그것이 함께 하게 될 거라는 확신을 주셨다. 말씀을 외우기 위해 계속 말할수록, 마치 비에 옷이 졎어들어가듯이 이 말씀이 내 마음에 각인 되었다. 내 인생에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이 반드시 따를 것이라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두 번째 반드시: 히브리서 11장 6절
다음 주에 산책하러 나가면서 말씀을 뽑았는데, 히브리서 11장 6절의 말씀이 뽑혔다. 그런데 여기에도 ‘반드시’라는 말이 있었다. 나름 모태신앙으로 많이 귀를 스쳐지나간 말씀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말씀이 나에게 이렇게 새롭게 다가올지는 몰랐다. 여기에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무언가를 믿어야 한다고 한다. 여기서 반드시라는 말은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모두에게 “라고 생각이 들었다. 또 ”조금이라도 의심하지 말고 온전히 믿을 것“이라도 느껴졌다.

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럼 무엇을 믿어야 하는 것일까? 두 가지 사실이다 <하나님은 존재한다는 것>과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존재라는 것>.. 즉 이 세상에 있는 모두에게 하나님은 존재하신다는 것과, 하나님을 찾는 자들은 무시당하지 않고 반드시 상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반드시“ 이니까..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나에게 조용히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없다고 의심하지 않기
하나님은 찾으면 무시당하지 않고 반드시 상을 받는다는 걸 절대 의심하지 않기
하나님은 나에게 이 말씀을 감명 깊게 남기셨다. 그리고 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1년 6개월의 시간을 바쁘게 살아갔다. 그리고 이 말씀은 2022년 1월 겨울 부모님을 뵙기 위해 오랜만에 한국에 가면서 내 생활에 표면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